제8화. 호구의 눈을 뜨게 하는 법 (The Red Pill) [1000억의 호구, 설계자를 사다]
작성자 정보
-
달리자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 264 조회
- 0 추천
- 0 비추천
- 목록
본문
한남동 펜트하우스 거실.
이탈리아산 대리석 테이블 위에는 수천만 원짜리 조각상 대신, 편의점표 트럼프 카드 수십 팩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자, 이거 한번 봐."
'교수'가 카드 한 장을 내 눈앞에 들이밀었다.
뒷면이 붉은색인 평범한 카드였다.
"뭐가 문젠데? 그냥 카드잖아."
"자세히 봐. 아무런 무늬도 안 보여?"
"장난해? 아무것도 없잖아. 깨끗한데."
교수는 피식 웃으며 주머니에서 작은 케이스를 꺼냈다.
그 안에는 옅은 보라색이 감도는 콘택트렌즈가 들어있었다.
"이거 끼고 다시 봐."
나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렌즈를 받아 눈에 꼈다.
눈을 몇 번 깜빡이고 다시 카드를 쳐다본 순간.
"……!!"
등골에 소름이 쫙 끼쳤다.
방금 전까지 아무것도 없던 카드 뒷면에, 형광색으로 선명하게 글자가 쓰여 있었다.
[ A ♠ ]
"이… 이게 뭐야?"
"적외선 특수 렌즈(IR Lens). 카드 뒷면에 형광 물질로 표시를 해둔 거야. 육안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안 보여. 이 렌즈를 낀 놈들한테만 보이지."
교수는 테이블 위에 깔린 카드들을 촤르륵 펼쳤다.
내 눈에는 이제 모든 카드의 정체가 훤히 보였다.
K, Q, 10, 2….
"와…. 미친…."
"너 홀덤 칠 때, 상대방이 기가 막히게 죽거나(Fold) 따라왔지?
그놈들은 네 패를 다 보고 치는 거야.
네가 에어라인(AA)을 잡고 속으로 낄낄거릴 때, 놈들은 네 이마에 붙은 '호구' 딱지를 보고 웃고 있었다고."
다리에 힘이 풀려 소파에 주저앉았다.
내가 '심리전'이라고 믿었던 것들, '배팅 싸움'이라고 착각했던 것들이 전부 코미디였다는 사실에 구역질이 올라왔다.
나는 벌거벗은 채로 광장에 서 있었던 꼴이다.
"그럼… 바카라는? 바카라는 딜러가 카드를 섞잖아. 내가 배팅하면 바로 까고."
"바카라가 더 쉽지."
교수는 새 카드 팩을 뜯더니, 순식간에 두 손으로 섞었다(Shuffle).
그의 손놀림은 마술사처럼 빨랐다.
"자, 네가 100억을 걸었다고 쳐. 어디에 걸래? 뱅커? 플레이어?"
"뱅커."
"좋아. 뱅커."
교수는 카드를 슈(Shoe)에 넣지 않고 손으로 한 장씩 뺐다.
플레이어: [ K ] [ 9 ] = 9점 (내추럴)
뱅커: [ 8 ] [ 8 ] = 6점
"플레이어 승리. 넌 100억 날렸네."
"그래! 이렇게 졌다니까! 뱅커에 걸면 플레이어가 나오고, 플레이어에 걸면 뱅커가 나왔어!"
교수는 혀를 쯧쯧 찼다.
"내가 방금 섞는 척하면서, 카드를 섞지 않았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
"뭐?"
"'탄(Tan)'. 미리 순서를 조작해 둔 카드를 통째로 바꿔치기하거나, 섞는 척하면서 순서를 그대로 유지하는 기술."
그는 다시 카드를 모았다.
"잘 봐. 이번엔 네가 이기고 싶게 만들어 줄게."
그의 손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탄'을 엮는 동작이었다.
"자, 이번엔 플레이어에 걸어 봐."
"플레이어."
오픈.
플레이어: [ A ] [ 8 ] = 9점 (내추럴)
뱅커: [ K ] [ Q ] = 0점
"네 승리. 기분 좋지? 이게 도박인 줄 알지?"
교수가 싸늘하게 웃었다.
"이건 도박이 아니야. **'대본(Script)'**이지.
놈들은 네가 언제 따고, 언제 잃을지 이미 시나리오를 다 써놨어.
너는 그 무대 위에서 춤추는 꼭두각시였을 뿐이야. 안경 잽이의 포카드? 100% 탄이야. 턴 카드를 딜러가 밑장빼기(Bottom Deal)로 넘긴 거라고."
"으으윽…!"
나는 테이블 위의 카드를 쓸어버렸다.
분노로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내 50억. 내 자존심.
실력 부족이 아니라, 애초에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는 게 너무 억울했다.
"그럼 나도 이거 가르쳐 줘."
내가 교수의 팔을 잡았다.
"나도 탄 섞고, 밑장 빼고 다 할래. 그 기술 배워서 박 실장 그 새끼 똑같이 털어버릴 거야."
하지만 교수는 내 손을 매몰차게 뿌리쳤다.
"꿈 깨. 기술? 그거 익히는 데만 최소 3년이야. 실전에서 안 들키고 쓰려면 10년은 걸려.
지금 당장 복수하고 싶다며? 언제 배워서 언제 써먹을래?"
"그럼 어떡하라고! 그냥 당하고만 있어?"
교수는 바닥에 떨어진 칩 하나를 주워 튕기며 말했다.
"너의 무기는 '손기술'이 아니야."
"그럼?"
"'돈'. 그리고 '연기'."
그가 내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넌 기술을 배울 필요 없어. 기술자인 나를 샀으니까.
네가 해야 할 건 딱 하나야.
여전히 돈 많고 멍청한 '호구'인 척 연기하는 것."
"연기…?"
"놈들은 네가 돈을 다 잃고 찌질해졌다고 생각해. 방심하고 있지.
그때 네가 다시 큰돈을 들고 나타나는 거야. '나 돈 구해왔어! 복수할 거야!'라며 씩씩거리면서.
그럼 놈들은 '아이고, 또 오셨습니까' 하면서 침을 흘리겠지. 똑같은 설계로 널 벗겨 먹으려고."
교수의 눈빛이 번뜩였다.
"바로 그때, 우리가 그 설계를 역이용하는 거야.
놈들이 렌즈로 네 패를 볼 때, 너도 렌즈를 끼고 놈들의 패를 봐.
놈들이 탄을 쓸 때, 내가 역으로 탄을 깨버릴 테니까."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단순한 도박이 아니다. 이건 전쟁이다.
정보전, 심리전, 그리고 자본전.
"좋아. 할게. 시키는 대로 다 할게."
"그럼 오늘부터 훈련이다.
첫 번째 수업. '포커페이스(Poker Face)는 잊어라'."
"뭐?"
"타짜들은 굳어있는 표정을 제일 의심해.
진짜 호구는 웃고, 화내고, 징징거려야 돼.
네 감정을 100% 드러내되, 결정적인 순간에만 딱 한 번. 거짓말을 하는 거야."
교수가 렌즈 케이스를 내 손에 쥐어주었다.
"껴. 그리고 익숙해져.
이제부터 네가 보는 세상은, 남들은 못 보는 '진짜 세상'이 될 테니까."
나는 다시 렌즈를 눈에 넣었다.
눈이 따끔거렸다. 눈물이 찔끔 났다.
하지만 흐릿했던 카드 뒷면의 글자들이, 이제는 선명한 칼날처럼 내 눈에 박혀 들어왔다.
[ 복수 ]
준비는 끝났다.
※ 다음 화 예고: 9화. 리벤지 매치. 현금 50억을 들고 다시 박 실장을 찾아간 강진혁. "돈 구해왔어. 한 판 더 해." 놈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강진혁의 메소드 연기가 시작된다.
관련자료
-
이전
-
다음





